Private/읽어본 책

호밀밭의 파수꾼

quantapia 2010. 5. 24. 17:24

이책은 읽으면 읽을 수록 새롭다. 그래서 또 읽었다.

 

 읽는 내내 이렇게 마음을 불편하고 무겁게 만드는 책도 드물것이다.

때로는 홀든의 빈정거림과 냉소에 공감이 가다가도, 옆에 있다면 한 대 때려주고 싶기도 하다.

밤을 새서라도 홀든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기도 하다가도 저런녀석 만날까봐 두렵다.

읽고나서 가장 먼저 내가 중얼거린 말은

 "명작은 명작이구나...."

 

 이 책은 여러가지 일화로 유명한 책이다. 존 레넌의 암살범 마크 체프먼이 레넌을 암살하고

난 후 도주하지 않고 이 책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또 암살동기 또한 '거짓과 가식에 대한

콜필드의 절규'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하니... 홀든에 심하게 감정이입했던 모양이다. 읽으면서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부분적으로 언급된 영화는 있지만, 이 책 전체가 영화화 되지는 못했다고한다.

그 이유를 작가는 '주인공 홀든이 싫어할까 봐 두렵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은둔의 작가 샐린저를 모델로 한 영화도 있다. '파인딩 포레스트'......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보고싶다. 홀든같은 주인공을 이렇게 생생하게 살리려면 자전적인 부분이 적잖게

가미되어 있을거란 생각에 샐린저의 생애도 궁금하다. 샐린저는 올해 91세의 나이로 타계하셨다고 한다.

 

내용을 보자면.......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변호사의 자녀로 태어났고 3남1녀중 둘째이다. 형은 나름

잘나가는(?) 작가이고, 천재 동생 앨리는 백혈병으로 죽게된다. 홀든이 가장 예뻐했던 여동생 피비...

우월하고 잘나가는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홀든은 상처와 상실감을 많이 느꼈으리라......

4번째 고등학교에서 또 퇴학을 당한 홀든. 이유는 성적 낙제이다. 낙제의 이유는 교사들이 모두 위선과

속물덩어리이기 때문이고, 기숙사의 친구들 역시  모두 거지같은 자식들뿐이라고 항변한다.

 

퇴학통지서가 집으로 도착하기 전까지 스스로 자유를 느끼기로 마음먹고 기숙사를 나온다. 호텔방에

숙소를 정하고, 여인들과 춤을추고, 엘리베이터보이에게 여자를 사기도한다. 여자친구 샐리와 연극을 보고

함께 떠나 같이 살자고 이야기하다가 미친놈 취급도 받는다.

이런저런 방황끝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 피비를 보기위해 집으로 간다. 오빠를 본 피비는 또 퇴학

당했음을 눈치채고, 도대체 세상 모든일이 다 못마땅하고 싫은 오빠는 좋아하는게 뭐냐고 묻는다.

거기서 나온 홀든의 대답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것이다. 조그만 어린애들이 호밀밭 같은데서 뛰어놀다가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파수꾼이 되는것... 오직 그것뿐이라고.....

 

  집을 떠나기로하고 피비에게 빌린돈을 갚아주려 만났다가 함께 가겠다는 피비때문에 결국 집으로

들어가게 되고 정신병원신세를 진다.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이나는데 홀든의 마지막 말이 인상적이다.

<난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 걸 후회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것뿐. 이를테면 스트라드레이터나 애클리 같은 녀석들까지도. 모르스 자식도 그립다.

정말 웃긴 일이다. 누구에게든 아무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건 요즘, 가면 갈수록 홀든과 같은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나 교사의 왜곡된 관심. 소통할 수 없는 외로움과 답답함에서 나오는 냉소와 무기력....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자라면 자랄수록 불의와 타협해야함을

가르쳐아한다는게....미안할때가 있다. 그래서 홀든이 더 짠하고 안타깝다. 어쩌면 모순투정이의 환경에서

바르게 자라고 있는, 바르게 자라는 척을 하는 아이들이 더 위선적인건 아닌지.......

 

다음은 홀든이 마지막에 찾아갔던 엔톨리니 선생이 홀든에게 적어준 메모이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